본문 바로가기
나를 철저히 달리보다

세상의 이치는 각이 없는 평등하고 공평한 구를 지향한다. 달도 지구도 태양도.. 그러나 인류만이 ...

by 하리마우 2023. 2. 7.
728x90
반응형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니까, 철학은 더 깊은 과학이 된다.

인문학 공부법 책을 읽다가 우연히 칸트의 명언을 접하게 됐다. 얼핏 보기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소린지 알긴 알겠는데 도무지 공감이 되질 않았다. 내가 아는 철학은 그저 고리타분한 학문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조금이나마 마음의 문이 열린 상태랄까? 아무튼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아 성찰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나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곧 나와 마주하는 과정이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다양한 고민거리가 존재한다.

돈 걱정, 인간관계, 진로 선택 등등..

그리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럴 때면 누군가 나 대신 인생 상담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나 가족이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만약 당신에게도 그러한 상황이 닥친다면 주저 없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시중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이 무수히 많은데 그중에서도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추천한다.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쓴 이 책은 아들러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감명 깊었던 구절 몇 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둘째,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셋째, 자유로워질 용기를 가져라. 넷째, 지금, 여기를 살아라. 다섯째, 공동체 감각을 가져라. 여섯째, 타자공헌하라. 일곱째, 운명애를 가져라. 여덟째, 춤을 추듯 살라.

앞서 말한 대로 위의 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이므로 참고만 하길 바란다. 다만 분명한 건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힘들 때일수록 자기계발서나 심리학 도서를 가까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분명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왜 각진 네모한 상자에 자신을 가두려고 하는가?

네모난 방 안이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는 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적부터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는데 지금도 여전히 적응이 잘 안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라곤 건물뿐이고 그나마 하늘조차 볼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가끔은 탁 트인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긴 하지만 이왕이면 좀 더 쾌적했으면 좋겠다. 만약 내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네모난 틀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겐 일종의 강박관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의 간섭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폐쇄적인 생활 방식은 자칫 우울증 및 대인기피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유용한 도구가 바로 SNS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시공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과도한 집착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게 늘 좋을 수만은 없다. 때로는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오해가 쌓일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고 쿨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약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진다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마련이니까.

세상의 이치는 각이 지는 걸 싫어한다. /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다. 모든 사물은 둥글둥글해야 보기 좋고 모나지 않아야 원만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관계든 사회생활이든 마찬가지다. 매사에 모가 난 행동을 하거나 성격이 까칠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둥글게 잘 융화되고 배려심이 깊으면 어딜 가든 환영받는다. 심지어 대인 관계가 좋은 사람일수록 일도 잘하고 능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 보니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들 눈치를 보게 된다. 괜히 튀거나 도드라져 보이는 행동을 했다가 미운털 박힐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입사 초기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늘 주눅 들어 지냈다. 그러다가 차츰 적응 기간을 거치면서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나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회식 자리에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자 상사뿐 아니라 동료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고 업무 능률도 높아졌다. 덕분에 회사 안팎으로 평판이 좋아졌고 승진도 빨랐다. 돌이켜보면 그땐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후회는 없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좀 더 일찍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보다 빨리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세상의 이치는 둥글둥글해야 잘 굴러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물론 예외는 있다. 정치판에서는 다르다.

서로 물고 뜯고 싸워야 권력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바쁘다. 심지어 상대 당 후보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기도 한다. 덕분에 선거철만 되면 온갖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오죽하면 정책 공약보다는 네거티브 공세가 판친다고 하겠는가.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누굴 뽑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기준을 세워두면 좋다. 우선 누가 진정 국민을 위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도덕성을 따져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현 가능한 공약인지 확인한다면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각이 없는 평등하고 공평한 구를 지향한다.

/여기엔 절대 불공평이란 없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없다면 어떨까? 아마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가령 돈 버는 재미에만 빠져 산다면 인생이 허무해질 테고 반대로 명예욕만 추구한다면 공허함을 느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린 끊임없이 내면을 갈고 닦아야 한다. 마음공부를 통해 내 안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고 영혼을 성장시켜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문제 해결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나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힘을 합친다면 분명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불교에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색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무색계'라고 칭한다.

쉽게 말해 색계란 인간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물 및 현상을 말한다.

반대로 무색계는 형체가 없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역을 뜻한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구분 짓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일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구제라는 사명을 띠고 사바세계에 오셨다. 그러려면 우선 고통 받는 중생들의 실상을 알아야 했고 그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랜 수행 끝에 진리를 깨우치셨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다. 이때 깨달은 진리는 곧 법신불로서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본질이다.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명상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반응형

댓글